역사이야기

전쟁사 이야기 - 전차의 등장, 최초의 전차부대

minu Story 2023. 5. 29. 15:15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을 만들어 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전쟁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전쟁이 인류가 천문학, 금속학, 건축학, 수학, 물리학, 화학, 지리학 등 다양한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오늘은 수레의 발달이 전쟁에 이던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전쟁사 이야기 - 전차의 등장

수레의 사용이 급격이 늘어나고 수레의 발달을 가져온 것은 수레의 본래 기능인 운반에서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전쟁에 쓰인 수레인 고대 전차(War Chariot)는 보병을 철저히 압도하며 수백 년 동안 군사기술의 상징으로 제국을 건설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 수레의 기술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전차의 등장 이전 당시의 전쟁은 창과 방패를 든 보병전이였다. 수메르의 주력군 역시 투구를 쓰고 방패를 이어 붙인 채 서로 밀집해서 하나의 대형을 이루며 진격하는 보병이었다. 이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것은 수레이다. 수레를 처음 계발했던  수메르에서 사용되던 수레는 몹시 무거운 바퀴를 갖고 있었다. 당시는 청동기 초기였다. 청동으로 만든  도끼나 칼, 끌 등으로  정교하게 만드는 데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 크고 투박한 수레는 느리고 회전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다 기원전 2500년경 수메르인들은 말 또는 당나귀가 끄는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수레를 전쟁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차의 등장인 것이다. 전차가 등장했을 때 적들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돌격해 오는 수십 대의 전차 앞에 대형을 유지하며 맞설 보병은 거의 없었다. 말이 끄는 전차를 처음 본 적은 경악했다. 초기의 수메르 사륜 전차는 전쟁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곧 사륜 전차는 위력을 잃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었다. 크고 투박하고 느린 수레의 단점을 보완한 기동성을 갖춘 새루운 전차 이륜 전차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륜 전차는 바퀴가 두 개뿐이고, 통나무 대신 여덟 개의 바큇살을 사용했다. 수레를 가볍고 빠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바퀴가 가벼워야 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이륜전차와, 이 전차에 적용한 새로운 기술인 바큇살이다. 차축을 중심으로 바큇살이 모여드는 형태의 새로운 바퀴는, 바큇살과 바큇살 사이에 빈 공간을 두어 무게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이륜 전차는 수메르의 사륜 전차에 비해 속도와 기동성에서 우수했다. 조금 더 다양한 지형에서도 운용할 수 있었고 비교적 장거리 이동이 가능했다. 이 이륜전차를 개발한 것은 수메르를 멸망시킨 아카드 제국(기원 2350~2150년경)이었다. 아카드제국의 이륜전차가 수메르의 사륜전차보다 뛰어났고, 결국 수메르는 멸망하였다. 아카드인들의 아카드 이륜전차는 두 마리 말이 끌었는데, 궁수, 마부, 창병 이렇게 세 사람이 올라탔다. 궁수는 장거리에서 적을 상대하고 도끼, 창, 검 같은 무기를 장비한 창병은 근거리 전투를 담당했다. 이렇게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전차에서 싸우는 방식은 그리스, 인도,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도 점차 보편적인 형태의 전차가 되었다.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기원전 2333~2279 재위)은 이 이륜 전차 시스템을 이용해 빠르게 영토를 확장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최초의 전차부대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전쟁에서 이 전차가 어떠한 역할을 했지 알아보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번영한 힉소스족은 기원전 1670년부터 1567년까지 이집트와 전쟁을 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이집트를 무너 뜨렸고, 이집트의 일부 지역을 백 년 동안 지배하기도 했다. 인류사 최고의 미스터리인 피라미드를 세운 그 강대한 문명 이집트는 어째서 그렇게 빠르게 패배했을까? 그것은 바로 수레, 전차이다. 저번 4대 문명 편에서 이야기했듯 이집트는 유독 수레의 발달이 늦었다. 그리고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이집트인들은 전차를 개발하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똑똑했다. 이집트 벽화에 확인할 수 있는 전차의 그림을 살펴보면 바퀴 테가 놀라울 정도로 얇게 설계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카드의 이륜 전차에 달린 바퀴 테와는 완연하게 구분된다. 또한 전차를 개량해 바퀴의 축이 뒷부분에 위치하는 보다 빠른 전차를 만들어 냈다. 시속 40킬로미터까지 달릴 수 있는 이집트 전차에는 합성궁(Composite Bow, 짐승의 뿔, 힘줄, 나무 등을 혼합해 만든 활)을 든 병사를 태웠다. 이로써 이집트의 전차는 더 긴 사정거리와 더 빠른 기동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집트 전차의 또 하나의 특징은 운전수와 궁수 두 사람만 탑승한다는 것이다. 당시 전차에는 운전수, 궁수, 창수 이렇게 세 명이 타는 게 일반적이었다. 두 사람만 탑승했던 이집트의 전차는 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사정거리가 긴 합성궁을 이용하여 사거리와 기동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에 비해 히타이트의 전차에는 일반적인 운전수, 궁수, 창수가 타는 형태의 전차였다. 이는 세 번째 병사가 방어를 전담했기 공격 와 방어에 밸런스가 좋지만 더 많은 무게를 견디어야 했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기원전 1275년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시리아의 카데쉬에서 인류 최초의 최대 규모의 강대국 간의 전쟁을 치렀다. 이 전투는 이집트인에 의해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군은 시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4만의 군사로 원정길에 나섰고, 히타이트 역시 무와 탈리 왕이 지휘하는 3만 5,000명의 군사와 3,500대의 전차 부대로 원정길에 올랐다. 이집트의 기록에는 람세스가 승리자였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무승부 또는 히타이트의 우세였다고 보인다. 히타이트 군대는 공격 전술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결과 이집트는 시리아에서 철군했고, 히타이트는 시리아 지역을 약탈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16년 후인 기원전 1259년, 두 나라 사이에는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