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2차 동학농민 운동 - 황도현전투(전주화약), 2차동학농민운동(반외세), 우금치전투(항일운동)

minu Story 2023. 6. 1. 13:58

지금까지 동학농민군은 고부 군수 조병갑에 횡포에 못 이긴 농민의 봉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반봉건적 신분제 철폐를 외치는 운동에서 열강의 침입속에 반외세운동에 참여하고 이에 나라의 주권을 뺴앗기는 일제 감정기  항일운동으로 까지 이어진 이름 없는 농민들의 나라를 지키고자 한 투쟁입니다. 이름 있는 양반가문의 누군가는 일제의 앞잡이를 하고 있을 때 이름 없는 농민 누군가는 자신을 모든 걸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 동학 농민운동을 전개 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2차 동학농민 운동 - 황도현전투(전주화약)

절라도 무장에서 전봉준과 손화중이 힘을 합쳐 일으킨 동한농민군은 전주성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저지하고자 관군을 내려보냈습니다. 1894 4월 6월 동학농민군은 처음으로 관군과 황토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동학농민군은 후퇴하는 척 황토현까지 도망갔고 이에 방심하면 따라오던 관군은 역으로 습격을 당하고 패하였습니다. 이렇게 첫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조정은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에 충격에 빠지고 이번에는 정예 관군의 추려 내려보냈습니다. 1894년 4월 23일 정예병사로 추린 관군과 동학농민군은 다시 한번 마주치게 됩니다. 조선관군은 농민군을 향해 대포를 쏘았습니다. 이에 반해 동학농민군의 무기는 대부분 죽창과 조총 몇 자루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이 전투에 이기기 위해 거대한 장태를 만들어 일종의 움직이는 방탄벽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2번째 관군과의 전투인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둡니다. 이에 관군을 지휘하는 전주성의 총지휘관 전라감사는 도망가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무능한 고종은 전주가 함락되자 농민의 봉기를 잠재우겠다고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청나라가 군사를 파견하자 일본은 텐진조약을 빌밀로 일본군을 조선에 파병하였습니다. 겨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외세를 끌어 들어 꼴이 되었습니다. 동학이 이루고자 했던 반봉건, 반외세 하지만 스스로 외세를 끌어들인 꼴이 되자 스스로 해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94년 5월 8일 조선관군과 동학농민군은 협약을 맺게 됩니다. 이것이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의 개혁 요구 조건을 합의하고 해산하기로 한 전주 화약입니다.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조건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집강소설치입니다. 집강소는 농막이 직접 참여하는 일종의 자치기구입니다. 2. 탐관오리 척결. 3. 신분제철폐. 이였습니다


2차 동학농민운동- 반외세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의 목전은 애초에 동학농민군 저지가 아니였습니다. 당시 조선을 두고 이권 다툼을 하던 열가을 사이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자고 하는것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기회로 삼은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점점이 일본의 영향역이 조정에 까지 퍼지자 기회주의자들은 친일을 했으면 조선의 조정은 점점 친일파 관료들이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조선의 군대까지 일본이 관리하게 됩니다. 1894년 9월 이렇게 나라가 일본손에 들어가게 될 위험에 처하자 전봉준은 다시 의병을 일으겼습니다. 이번에는 반봉건적인 1차 동학농민운동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2차 동학농민군군의 목적은 일본군을 물리치는 것이였습니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잊는 교통의 요지였던 전라도 삼레에서 뜻을 함께할 동학농민군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4천여 면 명의 동학농민군 이것이 2차 동학농민 운동의 시작입니다. 1894년 10월 경복궁을 정령 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합니다. 한양으로 향하던 동학농민군에 동참하는 농민들에 의해 그 수는 점점 늘었습니다. 그렇게 늘어난 4만여명의 엄청난 동학농민군,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는 일방적인 살육이었습니다. 농민군의 무기는 몇 자루 안 되는 화승총과 죽창이었고, 일본군의 무기는 최신식 소총이었습니다. 무기적 열세로 동학농민군은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본군의 총지휘자는 “동학군에 대한 조치는 엄멸한을 요한다. 향후 모조리 살육한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본군인 동학농민군을 찾아 전부 말살하고 다녔습니다. 전봉준은 이에 다시 한번 동학농민군을 소집합니다. 이에 무려 2만여 명의 농민군이 다시 모입니다.


우금치전투

일본의 군대에 저항하고자한 동학농민군, 충남 공주의 우금치에서 동학농민 운동의 마지막 그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집니다. 2000여 명의 일본군과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 숫자 차이는 10배이지만 최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입니다. 그들은 총알은 맨몽으로 맞으며 마음속으로 한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야만 우리의 다음세대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은 어떻게든 이 고개를 넘고자 했습니다. 압도적인 무기의 차이도 있었지만 이들은 결국 농민이었습니다. 2만 병의 동학군은 겨우 500여 명만이 남고 전부 전사합니다. 전봉준은 남아있는 무리들과 계속해서 전투를 하지만 모두 패배하였고, 1894 12월 27일 전봉준은 끝내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합니다. 전봉준에게 내려진 형벌은 사형이였습니다. 근대식 법원이 생기고 최초로 내려진 사형 입였습니다. 그리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마저 교수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최시형에서  사형 판결을 내신 사람은  바로 조병갑입니다. 참으로 씁쓸한 일입니다. 그 이후 남아있던 동한의 정신을 가진이들은 항일운동에 참여합니다. 언제고 우리나라가 위험할 때면 어김없이 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이름 없는 수많은 백성들 그들은 그렇에 숭고한 정신을 남기고 이름 없이 사람 졌습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