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십자군전쟁- 제1차 십자군 전쟁,예루살렘을 회복하다. 제2차 십자군 전쟁, 목적을 잃은 전쟁 - 변화

minu Story 2023. 5. 21. 20:28

유럽에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나라들이 있었고, 서아시아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슬람교를 믿는 셀주크 튀르크족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크리스트교에게도, 이슬람교에게도 중요한 성지였고, 이곳을 두고 일어난 종교전쟁이 십자군 전쟁(The Crusades)입니다.


제1차 십자군 전쟁 - 예루살렘을 회복하다.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Clermont)에서 열린 종교회의인 클레르몽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 지배하에 있는 예루살렘(Jerusalem)의 회복을 위해 성지로 향하는 십자군을 모집하고 전쟁 선언했습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하면 그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면죄의 깃발을 내세웠고, 이로 인해 유럽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십자군 움직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1차 십자군 전쟁에 나선 이들 중 일부가 세속적 야망과 개인적 이익을 위해 나섰다고는 해도, 나머지 대부분은 종교적 신앙심에서, 그리고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는 약속에 이끌려 합세했던 것입니다.최초의 십자군 움직임은 국왕 요리트 1세와 기사단들이 주도했습니다. 십자군은 아시아와 유럽을 횡단하여 예루살렘을 목표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1097년, 십자군은 안티옥(현 터키 영역)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루살람으로 진군했습니다.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지를 회복하였으나, 많은 이슬람 국가 국민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잔인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평가됩니다. 그 뒤 십자군은 아시아 대륙 끝에 있는 소아시아와 이스라엘에 이르는 넓은 땅에 네 개의 십자군 왕국을 세웠습니다.


제2차 십자군 전쟁


제2차 십자군 전쟁(1147-1149)이 시작됩니다. 이번 십자군은 십자군 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동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출발한 십자군은 중동 지역으로 향했지만, 이슬람 군대에게 패배하였습니다.제2차 십자군 전쟁 뒤 이슬람에는 지도자 살라딘(Saladin-살라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고, 해석하자면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이다)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서 태어나, 1171년에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살라딘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까지 손에 넣어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습니다.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지하드'를 선언했습니다. 지하드란 아랍어로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전쟁'이란 뜻입니다. 살라딘은 이슬람교도들을 이끌고 1187년에 완벽히 예루살렘을 되찾았습니다.1189년, 제3차 십자군전쟁.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직접 원정에 참가했습니다. 가장 강한 나라들이 뭉친 막강한 군대였습니다.하지만 원정 중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소아시아로 가는 도중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게다가 전쟁 중에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갈등은 싸움으로 치 닫았고,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갑자기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리처드 1세는 혼자서 계속 전쟁을 할수 없었습니다. 결국 살라딘에게 협상을 요청했습니다.리처드 1세의 협상조건은  "크리스트교도들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할 수 있게 해 주면 영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겄이었고, 살라딘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종료되었습니다.

목적을 잃은 전쟁 - 변화


제3차 십자군 전쟁 뒤에도 1270년까지 다섯차레나 십자군을 더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본래의 목전은 점점 잊혀지고 왕과 기사, 교황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했습니다. 십자군을 이라는 이름하에 가는 곳마다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렇게 십자군은 점점 사람들에게 멀어져 갔습니다.결국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제1차 원정만 빼고 모두 실패한 원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이슬람교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지금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Israel)의 수도입니다.  이스라엘의 80%는 유대교인 입니다.(나머지의 대부분은 이슬람교이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램은 기독교,이슬람교 뿐아니라 유대교에게도 중요한 성지입니다. 현제는 유대교가 차지 했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아니면 세종교가 화합하여 살아 간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적어도 타 종교를 배척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유럽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왕권과 신권이 서로 팽팽히 견제를 하고 있었는데 원정이 실패하고 교황의 권위가 떨어졌습니다.또 기사들은 오랫동안 전쟁 물자를 대느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런 상황 역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왕권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답니다.십자군 전쟁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 간의 접촉과 교류를 가져왔습니다. 이를 통해 유럽은 중동의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동의 문학, 예술, 건축, 음악 등의 요소가 유럽으로 소개되었고, 이는 유럽 문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중동 국가들 간의 경쟁과 정치적인 변동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간의 힘의 균형이 재조정되고, 이후 중동 지역에서 다양한 왕조와 제국들이 세워지고 붕괴되는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유럽의 십자군과의 접촉을 통해 중동은 유럽 문화와 기술, 예술 등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중동의 문화적 다양성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